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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신은 죽었다’ > 우릴 짓누르는 유교적 가치, 충과 효 포맷해야

by 안산상록수 2015. 4. 29.

 

우릴 짓누르는 유교적 가치, 충과 효 포맷해야 한다

[인문학 속으로] 우릴 짓누르는 유교적 가치, 충과 효 포맷해야 한다 | 중앙일보 문화일반

‘니체 전문가’ 이진우 포스텍 교수
니체가 ‘신은 죽었다’는 선언으로 기독교 천년 세상 무너뜨렸듯이
‘정신적 샤워’ 해야 새 공동체 창조

 

 

서양 사회를 지배하던 절대적 가치에 맞서 “신은 죽었다!”고 외쳤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당대를 관통하던 절대 가치를 향해 붕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니체는 ‘아모르 데이’의 반대편에서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주창했다.

뜻은 파격적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지난달 26~27일, 이틀에 걸쳐 서울에 올라온 이진우(59·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를 인터뷰했다.

그는 독일에서 수학한 ‘니체 전문가’다. 요즘은 국내 인문학계에서 니체의 깃발을 올리고 있다.

이 교수에게 물었다. 신이 죽은 자리, 거기에 과연 무엇이 있는가.

 - ‘신은 죽었다!’. 강렬한 선언이다. 무슨 뜻인가.

 

불교든, 유교든,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상관없이 절대적 가치가 있다.

그게 인격화하면 ‘신(神)’이 된다.

니체가 살던 빌헬름 제국은 기독교 사회였다. 신이 우리의 삶을 주재한다는 기독교적 가치가 1000년 넘게 사회를 억누르고 있었다.

니체는 그걸 무너뜨렸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과 함께.”
 - 컴퓨터 포맷 같은 것인가.
 “강력한 포맷이다. 포맷을 해야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깔 수 있다.”
 - 강력한 포맷을 한 자리에 무엇이 남았나.
“절망과 허무다. 절대적 가치가 무너졌으니까.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유럽에는 허무주의가 팽배했다. 그런데 니체는 허무와 절망의 밑바닥까지 닿으라고 했다. 거기가 끝은 아니었다.”

 - 끝이 아니라면.

“절대적 가치, 거대한 담론이 무너진 자리에서 시간이 지나자 뭔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건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의 중심을 창조해야 한다는 움직임이었다.”

이 교수는 절대가치가 무너진 후의 절망과 허무를 ‘창조적 절망’ ‘창조적 허무’라고 불렀다.
 - 2015년 한국 사회에도 니체가 필요하지 않나. 우리에게 ‘죽어야 할 신’은 무엇인가.
 “나는 ‘유가(儒家)적 가치’라고 본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충(忠)과 효(孝)다.”
 - 충과 효는 우리 사회의 상식이다. 그 가치를 부정하나.
“그게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라. ‘국가에 충성해라, 부모님께 감사하라’고 하면 젊은이들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왜 그럴까. 스스로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왜 국가에 충성하는지, 왜 효도를 하는지. 진지하게 물음을 던져본 적이 없는 거다.”

 - 그런 과정이 왜 빠졌나.

“강요됐으니까. 기독교적 가치가 니체를 짓눌렀듯이 유교적 가치가 우리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한 번 죽어야 한다.

철저한 개인주의를 겪어야 한다.

그래야 이시대와 호흡하는 젊은이들이 고개를끄덕이는 신(新)유교적 가치,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할수 있다.

21세기에 가능하고 바람직한 효의 방식을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정신적 샤워가 필요하다.”


이 교수는 대학 1학년 때의 경험담을 꺼냈다.

그는 74학번이다. 독문과를 다녔다. 하루는 3학년 과 대표가 몽둥이를 들고 왔다.

 ‘독문과가 잘 안 돌아간다’며 차례대로 엉덩이를 때렸다.

그는 강의실을 박차고 나왔다. “거기에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절대 가치가 깔려 있었다.

40년이 지난 요즘은 어떤가. 회사에 들어가면 먼저 묻는 게 ‘몇 살이냐’‘몇 학번이냐’다.

한 살이라도 많으면 ‘어, 내 후배네. 반말해도 되겠지?’라고 한다.

유가 초기만 해도 위로 십 년, 아래로 십 년은 친구였다.”


-니체에겐 기독교적 가치, 우리에겐 유가적 가치. 그런 절대적 가치가 무너진 곳. 어찌 보면 텅 빈 무대다.

니체는 거기서 무엇을 하라고 했나.
 “춤을 추라고 했다.”
 - 춤이라니. 무슨 춤을 추라는 건가.
“춤은 그냥 추어지지 않는다. 땅이 계속 우리를 끌어당기니까.

중력을 거스를 때 비로소 춤을 출 수 있다.

니체는 중력을 거슬러 허공으로 뛰어오르라고 했다.

그렇게 자신의 춤을 추라. 그런 춤꾼이 되라고 했다.”

 - 춤이 곧 삶인가.
“그렇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자만이 춤을 출 수 있다.”
니체는 그걸 니체식으로 표현했다.

위험하게 살아라.’ 익숙함과의 이별이자 낯섦과의 만남이다.

 

 - 위험하게 살려면.
“사람들은 저마다 찾고 싶은 섬이 있다.

그걸 찾으려면 항구에서 떠나야 한다. 익숙한 항구와 헤어져야 한다. 떠남이 없다면 섬도 없다.”
이 교수는 우리의 일상에도 그런 떠남이 있다고 했다.

미국 시애틀, 뉴질랜드, 호주 등에서 바람이 일고 있는 ‘슬로 리딩(Slow reading)’을 예로 들었다.
“‘슬로 리딩’은 독서 클럽이다.

정해진 시간에 카페에 간다. 음악도 안 나온다.

토론도 없다. 인터넷도 끄고, 휴대전화도 끈다. 사람들은 그 시간 동안 그저 자신이 가져간 책을 읽고 돌아온다.

나는 그게 항구를 떠날 때 만나는 바다라고 본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카페에서 5분 이상 멍 때려도 괜찮다.”

 - 멍 때리다 보면.
“우리 몸은 참 재미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사유(思惟)를 하게 된다.

 ‘Scholar(학자)’는 희랍어로 ‘Schole(여유)’라는 말에서 나왔다.

 좋아하는 대상을 오랫동안 머물러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다.

여유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깊이 보고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게 사유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탁 트인 자유로운 곳에서 산책하다 불현듯 떠오르는 사상이 진짜 사상이다.” 그럴 때 여유는 바다가 되고, 섬을 찾는 통로가 된다.

여유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이 교수는 “하루에 한 시간, 일주일에 하루라도 그런 여유를 가져야 한다.

니체는 삶(Life itself)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삶의 의미(The meaning of life)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삶 자체만 강조하면 생존이 되고 만다”고 설명했다.

 - 먹고살 게 있어야 사유도 하지 않나.
“그건 맞다. 그런데 부유한 사람들도 생존만 위해 사는 이가 많다.

그냥 돈을 벌기 위해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생존이 우리 삶의 1순위가 돼 버렸다.

요즘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와 금융위기를 겪으며 생존이 우리 사회의 1순위로 굳어졌다.

그래서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면 무엇을 놓치나.
잘 사는 것. 정말 잘 사는 것. 그걸 놓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잘 사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건 삶의 의미를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의 문제다.”
이 말 끝에 이 교수는 삶에 대한 니체의 정의를 읊었다.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삶이다.”

 이 교수는 그게 ‘삶에 대한 독점’이라고 했다.

- 독점이 무슨 뜻인가.
“여기서는 부정적인 뜻이 아니다.

 이 세상, 이거 내 거야. 내가 가는 곳이 세계의 중심이야. 내가 주인이야. 이거다. 삶의 의미를 찾아갈 때 비로소 자기 삶을 독점하게 된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네 삶의 독점자가 돼라! 자기 삶의 의미를 독점하라!’”
글=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진우는 …

1956년생. 연세대 독문과 졸업.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에서 철학 석·박사 학위. 40대에 계명대 총장을 지냈다.

한국 니체학회 회장과 포스텍 인문기술융합연구소장을 거쳤다.

 현재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 저서로 『테크노인문학』 『중간에 서야 좌우가 보인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 등.

[S BOX] “신은 죽었다는 말은 허무주의 아닌 삶에 대한 무한긍정”


이진우 교수는 “니체만큼 오해를 많이 받는 철학자도 드물다”고 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허무주의나 염세주의가 아니라 삶에 대한 무한긍정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니체만큼 절망적인 삶을 산 사람도 없다.

그런데 니체만큼 삶을 긍정한 철학자도 없다.” 니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고, 어머니는 목사의 딸이었다.

니체는 24세에 바젤대 교수가 됐으나 학교를 그만두면서 투병 속에 고독하게 살았다.

마지막에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다음은 니체에 대한 이 교수의 추천서 세 권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정동호 옮김, 책세상)=현대 철학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책. 신이 죽은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시적인 언어로 생동감 있게 풀어놓는다.

 ◆좋은 유럽인 니체(데이비드 패럴 크렐·도널드 L 베이츠 지음, 박우정 옮김, 글항아리)=‘환경과 기후, 지형이 한 사람의 삶과 사상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는 관점에서 니체 사상의 여정을 회화적 전기의 형식으로 파헤친다.

 ◆이 사람을 보라(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백승영 옮김, 책세상)=니체가 광기로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쓴 책이다. 자신의 삶과 사상을 되돌아본 자서전. 전통과 도덕에 대한 광기 어린 저항과 혁명의 기운이 서려 있다.

 

 

 

참고 >>> 니체는 왜 “신은 죽었다”고 했을까?

  •  김영조 기자
  •  승인 2019.07.29 14:06
  • 용기를 내어 자신을 극복하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위키백과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실존철학의 선구자이다.

 흔히 ‘망치를 든 철학자’로 불린다. 그의 저서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것 때문이다.

신은 그리스도교를 말한다.

 당시 유럽사회는 그리스도교가 주류를 이루고, 모든 문화와 가치의 기준이었다.

 그리스도교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플라톤은 세계를 이상계(이데아계)와 현상계로 나누었다.

 이상계는 영구불변의 관념적, 정신적 세계이고, 현상계는 생성, 변화, 소멸하는 현실적, 육체적 세계이다.

 이상계를 더 본질적이고 고차원적인 세계로 보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육체를 떠나 영혼이 이데아의 세계로 가는 것을 희구(希求)하였다.

그리스도교도 이분법에 따라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로 나누었다.

 신의 세계는 불변하는 초월 세계인 내세를 말하고, 인간의 세계는 변화하는 현상 세계를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신의 세계를 절대적, 초월적 가치로 존중한다.

 선과 악, 정의, 도덕등 서구의 사상과문화, 규범과제도는 모두 이러한 초월적인 가치에 밑바탕을 두고 있다.

초월적 가치는 현실의 모든 가치와 인간의 삶 자체를 무시하거나 부정한다.

 인간은 오로지 신에 의지하거나 신의 구원에 의해서만 내세에서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인간 스스로는 행복을 개척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구조화한 것이다.

 

예컨대, 밤에 혼자 산길을 내려오던 사람이 갑자기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되었다.

 겨우 나뭇가지를 붙들고 살고자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때 때 하늘에서 “기도하라, 그러면 구원될 것이다.”라는 울림이 들려왔다.

 그는 사지와 온 몸을 모은 채 밤새도록 기도하였다.

 그러나 구조는 되지 않았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눈을 떠보니 새벽이 오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밑은 낭떠러지가 아니고 편편한 평지였다.

 발을 뻗으니 바로 닿을 수 있었다.

 그는 밤사이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며 자신을 자책하였다.

 살기 위하여 발을 한번 뻗어보았더라면 평지에 쉽게 발이 닿았을 것이다.

 쓸데없이 공허한 하늘에만 의존했던 나약한 자신이 창피하였다.

 자신이 충분히 타개할 수 있었음에도 하늘(신)만을 절대적 해결사로 생각한 것이다.

 

초월적인 가치는 그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정작 현실의 가치가 무시되거나 부정된다.

 니체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이분법과 초월적 가치를 반대하고, 이를 타파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스도교가 종교의 이름으로, 구원이란 명분으로 인간을 나약화시키고 노예화한다는 것이다.

 그 타파의 방법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신은 죽었다“이다.

여기서 신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특정의 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니체가 그리스도교의 순수한 사랑의 정신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형이상학, 초월적 가치, 내세, 절대선, 도덕규범과 같이 그동안 인류가 떠받들어온 진리와 가치체계를 부정한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지니고 있는 비도덕적 행태, 부정적 이미지 등을 고발하고 성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찍이 그리스도교는

종교개혁운동의 단서가 된 면죄부 판매,

 신의 이름을 걸고 여덟 차례에 걸쳐 치러진 십자군 전쟁에서의 패배,

 과학의 진실을 은폐한 갈리레이(Galileo Galilei) 재판,

 진화론의 등장과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라

그 권위와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니체는 종교가 추구하는 절대 선(善)이나 초월적 가치가 이미 붕괴되었고,

 사회를 제도하고 규율하는 역할과 기능을 상실하였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였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작가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유행하였다.

 공자의 죽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유교 자체가 안고 있는 권위주의, 폐쇄성, 형식지상주의, 파벌주의 등을 비판하고,

 당시 지배층의 도덕적 위선과 무능, 부패를 지적하고,

 결과적으로 실용적 학문과 경제적 활동을 천시하다가 근대화에 뒤쳐진 것을 강조한 것이다.

 

신이 존재할 때 인간은 선과 악, 불행과 비극, 고통 등 모든 책임을 신에게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이 없어진 상황에서 인간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도 희망도 없어지게 되었다.

 이를 허무주의(니힐리즘 ; nihilism)라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니체는 초월적 가치 대신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이 죽고 난 뒤 인간은 더 이상 신에 의지할 필요도 없고, 의지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 신이 되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

 신 대신 새로운 존재로 등장한 것이 바로 초인(超人, 위버멘쉬 ; Übermensch)이다. 인간중심주의의 표상이다.

 

니체는 인간을 '초인'과 '최후의 인간(the last man, Der letzte Mensch)' 두 부류로 나눈다.

 최후의 인간은 기존의 가치를 믿고,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며,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진취적이고 창의적 사고 없이 기존의 가치규범에 예속되어 산다.

 

 남들 대학 가니까 대학 가고, 남들 따라 투자하고, 남들이 좋다고 하니 따라 한다.

 현대 사회 대다수가 이 부류에 속한다.

 

이에 반해 초인은 기존의 가치를 넘어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위험과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스스로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다.

 니체가 말하는 "고난을 견디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고난에게 얼마든지 다시 찾아올 것을 촉구하는 사람"이다.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된 아이 하나가 있다 하자.

 아이는 이제 의지할 곳도 없고, 인도해 줄 사람도 없다.

 이 상황에서 아이가 취할 태도를 생각해 본다.

이웃이나 국가의 도움을 받아 그냥 대충 살아가는 방법,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기 위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고 기술을 배우며 자신을 키워나가는 방법 등이 있을 것이다.

 

 전자의 형태가 최후의 인간이고, 후자가 초인이다.

이밖에 살아가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허무주의에 대하여 굴복하고 패배하는 것이 된다.

 니체는 자신의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지는 충동적인 자살은 죽는 자와 남아 있는 자에게 슬픔만 안겨주며, 삶을 완성시키는 죽음도 합리적인 죽음도 아닌 비겁한 자의 죽음이라고 하였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피할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치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Amor Fati 즉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사랑하는 것(운명애 ; 運命愛)이다.

 

니체가 “신이 죽었다”고 한 것은

허황되고 형이상학적인 관념에서 과감히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인간(삶)이라는 것을 중시하며, 허무주의의 도래에 대하여 운명이라는 것을 수용하고 사랑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삶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는 어디에도 없다.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 바로 자기 자신뿐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사람도 오직 자신뿐이다.

 용기를 내어 자신을 극복하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기존의 가치 따위에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며 현실을 살아가라는 것이

니체가 현재의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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