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프랑스 파리 사람들의 생활을 박물지처럼 묘사한 방대한 책이 번역되어 나와서 몇 쪽 훑어보았다.
1788년 12권으로 완간된 뒤 거장 볼테르나 루소의 저술을 뛰어넘는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이 책 『파리의 풍경』(송기형 외 옮김)은 검열 당국과 경찰의 추적을 받을 정도로 금서 목록에 올랐다고 한다.
노동자 계층 출신 저자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는 그 시대의 해부학 실험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짧은 몇 줄 문장이 상념을 자아낸다.
해부학자는 살아 있는 개의 네 발을 못질해서 테이블에 고정시키고,
그 아비규환 속에서 역시 산 채로 개복해 팔딱팔딱 뛰는 개의 심장을 관찰한다.
이런 무자비함이라니.
그 잔인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인류 진보를 향한 과학적 열정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동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 무자비함이라는 부정적 측면이 당연한 것처럼 결합되어 있다.
이 생생한 관찰 보고서 앞에서 어떤 당혹스러움과 불편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사회에 불가능한 삶의 풍경은 없다.
이를테면 현대 도시의 광장에서 사람의 시신을 화장하는 광경은 일상에서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것이지만 시공간의 일정한 격리가 전제되면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로 바뀔 것이다.
인간은 문명을 일군 존재이고 ‘야만’은 문명 이전을 일컫는다 해도 뒤틀린 문명은 야만보다 훨씬 더 끔찍한 풍경을 연출해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생존을 위한 약육강식의 법칙 바깥에서
같은 종을 오로지 괴롭히기 위한 목적으로 괴롭히다가 죽이는, 그런 잔혹함이 어느 다른 동물계에 존재한다는 얘기를 일찍이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런 일이 바로 우리나라 군대에서는 일어났다.
또는 이 시대 어느 시점에서 목격하게 되는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의 풍경도 그렇다.
세계인들의 눈으로 보면 현대적인 건축물들 사이에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솟아 있는 것만으도 꽤 독특한 경관일 텐데,
거기 농성하고 있는 서글픈 이들과 더불어 그 옆에 ‘폭식투쟁’을 벌이는 무리의 중첩된 광경은 거의 그로스크한 느낌을 던져준다.
조금 과장이 될지는 모르나 이것은 과연 인류사적인 풍경임에 분명하다.
단식이라는 수단으로 의사 표시를 하는 옆에서 그에 대한 대응으로 폭식 시위를 벌인 전례가 다른 어느 민족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 내기를 해도 좋은데 없었을 것이다.
21세기의 우리 민족은 이토록, 워낙 ‘창발적’이다.
테크노밸리라 이름 붙여진, 말하자면 현대 디지털 문명의 첨단을 지향하는 공간에서는 황당하게도 서 있던 발밑이 꺼지면서 평범한 이들이 한순간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가을 햇살 아래 무대 위에서 음악과 춤이 흐를 때 수십 명의 관객은 동시에 지하로 사라졌다.
그로테스크한 풍경은 이렇게도 끝이 없다.
정치적인 국면에서 비정상의 정상화는 별도로 잘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일반 시민들의 삶에서는 오히려 비정상의 일상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수백 명의 목숨을 담보하고 출항한 여객선은 파도도 없는 잔잔한 바다에서 무사히 항해해 승객을 내려주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큰 사고가 터졌으면 국가는 최선을 다해 생명을 구조하는 것이 정상이다.
상식적인 눈으로 튼튼해 보이는 뚜껑은 실제로 튼튼해야 정상이다.
사람 사는 아파트에는 겨울 난방비가 0원으로 나오지 않아야 정상이다.
조선시대 말, 하나의 군(郡) 단위에 이방의 머릿수가 수백 명이었다면 이것은 어마어마한 비정상이다.
그 이방들은 지금 21세기에 난방비를 한 푼도 내지 않은 채 이웃을 착취하는 아파트 주민으로 변신했다.
이러한 비정상을 정상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나선 아파트 주민, 배우 김부선씨에게 대통령은 마땅히 표창장을 수여해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진 않더라도 비정상이 일상화된 그로테스크한 나라에서 살고 싶은 국민이 얼마나 되겠는가.
출생률이 곤두박질칠 만도 한 것이다.
정재숙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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