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문답법을 통한 깨달음,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를 중시하였다.
말년에는 아테네의 정치문제에 연루되어 사형판결을 받았다.
출생-사망국적활동분야출생지
BC 469? ~ BC 399 |
고대 그리스 |
철학 |
그리스 아테네 |
소크라테스의 사람을 보는 10가지 지혜 / 인생을 바꿔줄 삶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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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소크라테스는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를 이룩한 인물이다.
소크라테스의 생애를 추정할 수 있는 초창기 자료는 대부분 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Xenophon)에게서 나왔다.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Theaetetos)》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경 아테네에서
조각가인 아버지 소프로니코스(Sophroniscus)와 산파인 어머니 파이나레테(Phaenaret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을 가르치는 일 즉, 철학적 토론에 매진했는데,
남루한 옷차림으로 광장을 거니는 그에게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강의를 통해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누렸던 소피스트(Sophist)와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왜소한 체격과 투박한 외모를 가졌으나 체력이 좋고 참을성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느긋한 성격이었으며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고, 부(富)에 연연하지않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크산티페(Xanthippe)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크세노폰은 《회고록(Memorabilia)》에서 어머니의 엄격함에 대해 불평하는 아들과 아들을 타이르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다루었다.
이를 근거로 후대 저작들에서 크산티페는 종종 잔소리 많은 악처로 묘사되는데 이는 과장된 측면이 크다.
소크라테스는 말년에 정치적 문제에 휩쓸렸다.
당시 아테네에는 기존 민주주의 세력과 스파르타의 법을 새로이 차용하고자 한 귀족주의 정파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패배하자 귀족주의 세력이 힘을 얻었으나 다시 세를 회복한 민주주의 정권은 소크라테스를 귀족주의의 본보기로 처형하고자 했다.
비록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이론들은 민주주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였고, 제자와 친구들 상당수가 귀족주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신성모독과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돈(Phaidon)》에서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소크라테스 철학사상의 특징과 의의
고대 그리스 철학이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사상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러나 직접 남긴 저작이 없기 때문에 그의 고유한 사상을 명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의 학설은 제자들이 남긴 기록과 그 안에 담긴 소크라테스의 언행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되고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문답법이라는 독특한 교육방식과 재판과정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그의 철학사상의 특징과 의의는 일반적으로 다음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는데 일반적인 교사들이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답을 주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 경건하고 불경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신중함과 무모함이 어떻게 다른지, 우정을 어떻게 볼 것인지 등에 관해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답을 찾아 나가도록 유도하였다.
질의응답을 통한 지식의 추구라는 변증법 방식은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발전시켰다.
둘째,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고자 했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고대 격언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델포이 신탁은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였으나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다녔다.
이와 같은 인간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과 문답법을 이용한 내면적 탐구는 고대의 철학적 관점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셋째,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윤리적인 측면이 강했다.
실제 생활에서도 절제를 추구하였던 그는 ‘선’을 중시하여 토론 과정에서도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졌다.
또한 그는 옳은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바르게 행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덕과 앎을 동일시하였다.
최선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참된 덕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의 추구는 스토아학파의 선구적인 모습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넷째,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었다.
특히 ‘현인(賢人)에 의한 통치’, ‘화려한 연설에 대한 비난’,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위협으로 비춰졌다.
이후 플라톤은 이러한 사상을 발전시켜 이상적인 철인정치(哲人政治)를 보다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한편 일부 연구자들은 아름다움, 선과 같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는데서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이데아'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으나, 두 사상의 개연성에 비약적 측면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건장한 추남, 세계 4대 성인 소크라테스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인 소크라테스1)는 아테네에서 조각가인 아버지와 산파(産婆)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얼굴은 크고 둥근 데다 이마는 벗겨지고 눈은 툭 불거졌으며, 코는 뭉툭하고 입술은 두툼한 데다 키는 땅딸막했다. 게다가 배가 불룩하여 걸을 때에는 오리처럼 뒤뚱거렸다.
누가 봐도 추남이라고 부를 만했지만, 신체만은 건강한 편이어서 추위나 더위에도 대단한 인내력을 발휘했고, 밤새워 술을 마시고도 끄떡없었다고 한다.
그가 전쟁에 참가했을 때, 혹독한 겨울날씨에도 그는 맨발로 얼음 위를 걸어갔다.
한여름철에는 이른 아침부터 꼬박 밤을 새우기까지 연병장 한가운데에 서서 깊은 사색을 했고,
해가 떠오르자 태양을 향해 기도를 드린 후에 비로소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그는 세 번이나 전쟁에 참가하여 용맹을 떨쳤으며,
모든 동료가 도망칠 때에도 장군과 함께 아군과 적군을 돌아보며 태연하게 걸어갔다고 한다.
그는 부친의 직업을 이어받는 일이나 가족을 부양하는 일에 무관심했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다.
가난했기 때문에 누추한 옷차림으로 아테네 거리에서 아무에게나 말을 걸었다.
그의 뒤에는 항상 많은 제자들이 따랐으며, 그 가운데는 상류사회 출신도 많이 끼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보수로 제자들을 가르쳤고 대개 저녁 한 끼로 만족했는데,
소피스트들이 수업을 제공하는 대가로 적지 않은 보수를 받아온 것과는 대조적이다.
소크라테스에 못지않게 유명한 인물이 그의 아내 크산티페다.
그녀는 남편이 철학자라는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으며, 집에서는 마치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남편을 못살게 굴었다.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서둘러 집을 나와 거리에서 그의 제자들과 철학적 담론에 빠져들었고, 소크라테스는 비로소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어떤 제자가 “선생님,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까, 안 하는 것이 좋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결혼하게, 온순한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사나운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하튼 가장의 의무를 소홀히 한 소크라테스를 볼 때, 악처의 대명사인 크산티페에게 오히려 동정의 눈길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아내 크산티페
어느 날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앞에서 그에게 호통치며 물벼락을 안기자, 그는 “저것 봐, 천둥 뒤에는 항상 소나기가 쏟아지는 법이야” 하면서 시치미를 떼었다고 한다.
그러나 악처의 대명사로 알려진 그녀가 소크라테스에게는 결과적으로 철학에 몰두하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아이는 산모가 낳는다, 산파술
소크라테스의 교육 방법은 질문과 응답을 통한 대화로 진행되었는데, 처음에는 단순한 문제부터 시작해서 점점 심오한 문제로 파고들어 갔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경우다.
“덕이란 무엇인가?” “예, 덕이란 좋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것에는 건강도 있고, 명예도 있고, 권력도 있을 텐데, 이런 것들이 과연 덕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지요.” “그럼 덕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감으로써 결국 상대방이 자기의 무지를 인정하고 더 깊은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방법인데, 이를 두고 우리는 ‘소크라테스적 반어법’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러한 식의 문답법을 산파술(産婆術)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그의 어머니의 직업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산파는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지, 출산이 더디다고 해서 산모 대신에 아이를 낳아줄 수는 없다.
아무리 고통이 크더라도 아이는 산모 자신의 힘으로 낳아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진리라고 하는 옥동자(玉童子)는 배우는 사람 스스로에 의해서 산출되는 것이지, 스승이 대신해서 낳아줄 수는 없다.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주면 되고, 또 그래야만 한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으나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렇듯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를 통해 진리를 추구해 가는 광경이야말로 교육의 아름다운 이상이다.
오늘날 중 · 고등학교는 물론 초등학교나 유치원마저 일류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기관으로 전락해 버리고
공교육보다는 사교육에 더 열심을 내다 보니, 교사와 학생의 인격적인 대화는 기대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사회 지도층이 이러한 병폐를 고치기보다는 오히려 앞장서 부추기는 형국이니,
소크라테스의 교육 방법은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무지함을 깨닫는 사람이 현명하다
아폴론 신에게 신탁을 구했다는 델포이 신전
소크라테스가 마흔 살 되던 무렵,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카이레폰이 델포이 신전에 가서 아폴론 신에게 물었다.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굽니까?”
그러자 신전의 무녀는 “소포클레스는 현명하다. 유리피데스는 더욱 현명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라고 대답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소크라테스는 즉각 이름난 현자들을 찾아다니며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들이 참된 지혜를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자만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왜 신이 자기를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지목했는지 깨달았다.
신전의 양쪽 기둥 밑의 비명(碑銘)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를 평소 외치고 다녔을 만큼 그는 스스로 무지하다고 생각했던 데 비해, 이름난 현자들은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른바 현자들보다 적어도 한 가지는 더 알고 있었던 셈이고, 바로 이것이 ‘무지(無知)의 지(知)’2)인 것이다.
많이 안다고 자랑하는 사람에게 진리가 나타날 수 없다.
모든 진리는 무지를 자각하는 사람에게만 파악된다.
즉 진리는 겸손한 자에게만 스스로를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무지를 자각한 사람만이 지혜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고, 그런 애지자(愛智者)만이 영혼을 잘 가꿔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과 행동은 일치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식은 다만 지식을 위한(죽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아는 만큼 반드시 행하는(살아 있는) 지식이었다.
선을 알고 나서도 그 선을 힘써 행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가령 선이 이쪽인데도 정반대의 길로 달려가서 일부러 악을 행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악은 인간이 선을 잘 모르는 데서, 즉 무지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선악을 잘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는 모르고 악을 행하는 자보다 알고도 악을 행하는 자가 더 많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보자.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세금을 빼먹고 눈치껏 부동산 투기를 하며 서민들은 상상하지도 못할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다.
온갖 기술을 다 동원해서 돈세탁을 하고 자녀들의 명문학교 진학을 위해 위장 전입을 감행하며, 병역을 회피하거나 외국 국적을 취득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에 대해서도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생각이 욕망이나 무지에 의해 흐려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장관의 물망에 오른 사람이 미리 그 사실을 알았다면 감히 불법적인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인데, 이는 긴 인생의 과정에서 부도덕한 행위가 언젠가는 손해로 다가올 것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에게는 욕심을 절제하며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가르쳐 줘야 하고, 또한 바르게 사는 습관이 몸에 배도록 스스로 훈련하게 해줘야 한다.
이렇게 보자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식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다.
가령 “잘 아는(知) 목수가 좋은(善) 목수다”라는 말처럼 앎과 좋음이 일치하는 것이다.
3) 좋은 목수, 즉 기술이 좋은 목수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많이 알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그 선에 대해 우선 많이 알아야 한다.
철학논술
Q.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대화를 즐겼으며, 절대적 진리와 보편적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즉 절대적 진리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냈고, 누구라도 이성적 사유를 바탕으로 대화를 하다 보면 동일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했다.
프랑스의 여배우인 브리짓 바르도가 한국의 개고기를 먹는 풍습을 야만적이라고 비난했다.
소크라테스가 한국 사람이었다면 그녀의 말에 과연 어떻게 반응했을까?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죄목으로 고소를 당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년들을 부패하게 했다.
둘째, 국가가 지정한 신 대신에 이상한 신을 믿는다.
청년들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깨닫고자 사색에 잠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보고 고소인들은 그것을 마치 타락하여 흐느적거리는 것으로 간주했다.
물론 이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자기가 옳지 않은 일을 할 때는 그것을 반대해온 내면적인 양심의 소리(Daimon)4)를 듣곤 했는데, 이것을 두고 아테네 시민들은 그가 새로운 신을 믿는다고 매도했던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이유 외에 실제로는 소크라테스의 정치적 기반이 허물어졌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상업 지향적인 문화도시 아테네와 군국주의적 농업국가인 스파르타 사이에 동족상잔의 비극인 펠로폰네소스 전쟁5)이 일어났고, 이 전쟁에서 결국 스파르타가 승리하게 되자 아테네에는 스파르타 방식의 귀족정치와 과두정치6)가 수립되었다.
서른 명으로 구성된 과두체제는 공포정치를 실시했는데, 소크라테스는 이 위원회에 끌려가 “당신의 교육을 그만두라”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명령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교육을 계속했다.
주위에서는 그가 처형될 것이라고 걱정했으나 그는 태연했다.
위정자들의 잘못된 요구에 대한 그의 태도는 너무나 분명했는데, 여기에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즉 과두파 인물 중에 그의 제자와 플라톤의 큰아버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두체제가 8개월 만에 무너지고 다시 민주주의자들이 권좌에 올라서게 되자 소크라테스는 정치적 기반을 상실하고 말았으며, 결국 앞서 말한 누명을 쓴 채 고소를 당하게 되었다.
또한 서른 명의 참주들이 어떤 사람에게 부당한 누명을 씌워 정치적으로 살인하려는 데 대해 소크라테스는 동조하지 않았고, 이것이 그들에게 증오감을 심어 주었다.
당시 아테네를 지배했던 부정한 야심가들에게 ‘모든 진리의 기초를 도덕에 둔’ 소크라테스는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재판 당시의 배심원은 500명이었는데 신에 대한 불경죄의 경우 일단 유죄냐 무죄냐만 판결을 내렸다.7)
결과는 280대 220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유죄였다.
다음에 형량을 놓고 다시 판결을 내리는데, 원고 측이 요구한 형량은 사형이었고 소크라테스 측에서 요구한 형량은 벌금형으로, 그것도 처음에는 단 1므나를 제시했다.
결국 플라톤 등이 그를 설득하여 30므나로 정해지긴 했지만,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믿었던 소크라테스는 벌금 1므나를 내는 것도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내 재판이 열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서 누구에게 사과하거나 애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민들과 배심원들을 꾸짖으며 정의와 진리의 길을 설파했다.
“당신들은 자신들의 지갑을 가능한 한 많이 채우고, 명성과 존경을 받으려고만 노심초사하고 있구려.
더구나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도덕적인 판단과 진리, 그리고 당신들의 영혼을 개선하는 데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으며, 또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8)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죽음을 재앙이라고 생각하지만, 죽음은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첫째로 죽음이 완전히 무로 돌아가는 것일 경우, 모든 감각이 없어지고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은 잠을 자는 것과 같을 것인데, 그보다 더 즐거운 밤이 어디 있겠습니까?
둘째로 죽음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여행길과 같은 것이라면, 생전에 만났던 훌륭한 사람들을 다시 만나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나는 죽음을 통해 귀찮은 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깁니다.
따라서 나를 고소하거나 유죄로 투표한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사형을 받기 위해, 여러분들은 살기 위해······.
그러나 우리 가운데 어느 쪽 앞에 더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신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의 제청과 마지막 변론은 결국 그에게 무죄를 판결한 배심원들의 비위까지 거슬려 360대 140이라고 하는 큰 표 차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 죽음이란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즉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지혜를 추구하는 참된 철학자라면 육체로부터 마땅히 해방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영혼의 활동을 방해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의 영혼이 육체적 욕망이나 감각에 사로잡혔을 때에는 진리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육체를 먹여 살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비진리를 말해야 할 때도 있다.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괴로움도 크거니와, 더구나 육체에서 파생된 자녀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는가 말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회피하는 사람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愛智者), 즉 진정한 철학자가 아닌, 고통과 죄악의 덩어리인 육체를 사랑하는 자가 되고 만다.
이러한 주장을 듣고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살이라도 해서 죽음을 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살은 죄악이라고 말한다.
인간과 신의 관계는 짐승(가축)과 인간의 관계처럼 주종(主從) 관계인데, 종이 주인의 허락도 없이 자살해 버린다면 주인이 무척 노여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나 돼지가 자기들 멋대로 골짜기에 투신자살해 버렸을 때 그 주인이 속상해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의 허락도 없이 자살해 버린다면 신 역시 속상해할 것이다.
자살은 신에 대한 반역이고, 범죄 행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 신이 부를 때가 있다.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허락이 떨어졌을 때 기꺼이 떠나야 한다.
만일 그때에도 삶에 집착해서 살려고 발버둥을 친다면, 그 역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아테네 법률에 의하면,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24시간 안에 처형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에게 감사의 제물을 바치러 떠난 배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집행이 연기되었다.
마침내 배가 들어온 날 아침, 감옥에서
친구들은 “돈이 얼마나 들든지 간에 간수를 매수할 테니 도망쳐라”라고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이때 그는 “내가 지금까지 아테네 법률을 지키며 잘 살아왔는데, 나에게 불리해졌다고 해서 법을 어기는 것은 비겁한 일이지 않는가”라며 탈출을 거절한다.
바로 이것이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것만 보면, 재판정에 섰을 때 이미 소크라테스는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최후를 맞이했던 감옥
사형집행 시간은 해가 지는 때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해가 진 다음에도 음식을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신 후 독배를 마셨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에게 약을 빨리 가져오도록 재촉한다.
독이 든 잔을 간수에게서 받아들고, 그는 태연하게 기도를 올린다. 그런 다음 조용히 마셔 버린다.9)
크산티페를 비롯한 여자들을 이미 밖으로 내보낸 후였는데, 왜냐하면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죽는 순간은 사람에게 대단히 중요하고, 그래서 사람은 조용히 죽어야 하는데, 사람이 있으면 방해가 된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감옥 안을 거닐다가 다리가 무겁다고 하면서 반듯이 누웠고, 간수는 종종 그의 손과 발을 살펴보다가 발을 꼭꼭 누르면서 감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대답하자 간수는 몸이 점점 식어간다고 말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캔버스에 유채, 1787독배를 드는 소크라테스의 모습
하반신이 거의 다 식었을 때, 소크라테스는 얼굴에 가렸던 천을 제치면서 “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 두었다가 꼭 갚아 주게”라고 부탁했고, 이에 대해 크리톤은 “잘 알았습니다. 그 밖에 할 말은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하지만 이 물음에는 더 이상 아무 대답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소크라테스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 일을 반성했다고 말하지만, 여기에서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약(醫藥)의 신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어떤 사람이 병이 들었다가 나을 경우, 감사의 뜻으로 닭 한 마리를 신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인생의 모든 병에서 벗어났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비극이 아니었다.
그는 죽음을 초월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듯이, 진리와 정의를 향한 그의 철학 정신 앞에 죽음은 결코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물론 저서를 한 권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핵심 사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인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것은 살아생전의 독보적인 인품과 더불어 죽음의 순간에 보여준 위대하고 장엄한 모습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소피스트들이 상대적이고 회의적인 태도에 머물렀던 데 반해,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와 객관적인 도덕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이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논리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열심히 설파했다.
그는 현실 생활에서 직접 써먹을 수 있는 처세술 대신에 인간의 본질과 정의로운 행위를 밝히는 데 노력을 다했다.
윤리학에서도 천박한 행복주의에 머물지 않고, 인간이 도달해야 할 순수한 이상을 추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세계 4대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또 우리에게 기꺼이 철인(哲人)10)으로 부르도록 만든 것은 진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삶에 대한 그의 진지한 자세 때문이 아닐까 한다.
소(小)소크라테스학파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그의 정신을 온전히 계승하여 발전시킨 사람은 물론 플라톤이다.
그러나 그 사상의 어느 한쪽만을 발전시킨 제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틀어 우리는 소(小)소크라테스학파라고 부른다. 키니코스학파는 덕을, 키레네학파는 행복을, 메가라학파는 지식을 강조했다.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BC 445?~BC 365?
먼저, 키니코스학파는 안티스테네스11)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인간에게 덕이 가장 중요하며 덕이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행복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 덕이란 모든 욕심을 버리는 무욕(無慾)한 생활로만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사상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 바로 그의 제자인 디오게네스12)다.
디오게네스가 삶의 목표로 삼은 것은 무욕과 자족, 그리고 무치(無恥)다.
아무런 욕심 없이 현재의 처지에 스스로 만족하며, 아무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생활이 그가 꿈꾸는 삶이었다.
그리고 항상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동물로 개를 꼽았다.
개는 아무것도 갖지 않고, 남의 눈치를 보는 일도 없으며, 주는 대로 먹고 아무데서나 잠을 잔다.
이러한 생활이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이었다.
그는 큰 통 속이나 개집에서 개와 함께 살았는데, 가진 재산이라고는 물을 떠먹기 위해 필요한 그릇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어린아이가 손으로 물을 떠 마시는 것을 보고 이 그릇마저 내동댕이치고 말았다고 한다. 키니코스(Kynikos)라는 말은 ‘Kyon(개)’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며, 또 그들을 견유학파(犬儒學派)라고 부르는 것도 개와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그는 무치와 관련해서, 우리가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본능적 욕망을 간단하고 편리하게 채우면 된다고 주장했다. 가령 배고플 때 먹는 행위를 탓할 수 없듯이, 남녀가 사랑하는 일 또한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타고난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은 떳떳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괜스레 부끄러워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노숙하는 디오게네스디오게네스는 견유학파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무욕과 자족, 그리고 무치를 행복의 목표로 삼고 생활했다.
그것은 자연에 거슬러 인간의 본능을 짓누르려는 우리의 잘못된 풍습이나 문명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반(反)자연적인 것에 맞서서 그것들을 없애려 노력해야 한다.
디오게네스에 의하면, 원래 자연은 인간이 아무것도 갖지 않아도 살아가도록 창조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문화를 지나치게 즐기는 것에서 벗어나 원시 상태의 단순함과 순수함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사회의 관습이나 풍속뿐만 아니라 국가의 법률까지도 귀찮은 것으로 봤다.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이성이 있으며, 이에 따라 누구나 보편적인 법을 좇을 것이기 때문에 굳이 개별적인 국가의 테두리 같은 것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어느 날,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현자를 찾기 위해 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니는’ 기인(奇人) 디오게네스를 방문하고자 그의 집을 찾았다.
대왕은 “그대가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었고, 디오게네스는 “다른 것보다 햇볕이나 가리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대왕이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기꺼이 디오게네스가 되겠다”라고 말하면서 돌아갔다는 에피소드는 너무나 유명하다.
물론 디오게네스의 행동을 우리가 현실의 삶에서 그대로 흉내를 낸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스스로 만들어낸 물질문명에 압도당하고 자기들이 창조해낸 문화에 오히려 얽매여 가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문명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과 자연으로 복귀하자는 정신만은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다.
특히, 자원고갈과 환경오염 그리고 인간성의 상실 등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의 사상은
“과연 문명의 발달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었는가”라고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 주고 있다.
아리스티포스(Aristippos), BC 435?~BC 355?
다음으로, 키레네학파는 키레네에서 태어난 아리스티포스13)가 그 창시자이며, 쾌락주의를 주장한다.
아리스티포스는 “덕이 행복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로부터 “쾌락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이라는 주장을 이끌어냈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정신적 쾌락뿐만 아니라 물질적 · 육체적 쾌락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이 학파의 학자들은 점차 그 쾌락을 얻기가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고, 특히 극단적인 육체적 쾌락은 반드시 고통과 후유증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초기의 쾌락주의는 후기에 들어와 염세주의(厭世主義)로 바뀌었다.
마치 처음에는 적은 양으로도 만족하다가 차츰차츰 그 양을 늘려가야 똑같은 쾌락을 느끼게 되는 마약중독자처럼, 쾌락이란 항상 더 강하고 큰 자극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의 클라이맥스를 경험한 사람에게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끝내는 자살과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가난한 나라보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발달되어 있는 북유럽의 선진국에서 자살률이 높고, 쾌락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부유층에서 오히려 자살이 많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메가라학파는 메가라 지방 출신인 에우클레이데스14)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덕은 지(知)다”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으로부터 지식을 중요하게 보고 또 그것을 선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주지주의(主知主義)를 고집했다.
출처
제공처 정보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 : 한 권으로 끝내는 서양철학 이야기 2008. 7. 15. 책보러가기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는 서양철학의 뿌리와 역사를 청소년들에게 제시해 주기 위한 저자의 부단한 노력이 엿보이는 책이다. 주요 철학가들의 일상적 삶은 물론, 그들이 일...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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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반석
[네이버 지식백과] 건장한 추남, 세계 4대 성인 소크라테스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 2008. 7. 15., 강성률, 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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